일 자위대 군악대가 옵니다. 진해 군항제에.
시사 큐비즘 2009/03/23 16:07 최재천
▲ 진해 세계군악의장페스티벌 리플릿
1. 자위대 군악대가 옵니다. 벚꽃과 함께
우리나라 최대의 벚꽃축제 중 하나로 진해군항제가 있습니다. 군항제 기간 중 ’2009 진해 세계군악의장페스티벌’이 열립니다. 여기에 일본자위대 음악대가 참가합니다. 동의하십니까?
잘 아시다시피, 일본은 군대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경찰도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육해공군 체제로 자위대를 두고 있습니다. 그 자위대 중 해상자위대 동경음악대가 이번 세계군악의장페스티벌에 참가해 시가행진과 의장공연 등을 펼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참가자격이 없네요. 군악대 행사인데, 왜 자악대가 옵니까. 그러면 다른 나라 경찰 악대가 대신 참가해도 상관없나요. 자위대라는 이름은 전세계 일본밖에 없기 때문에 아예 참가자격이 없으니 참석하지 말라고 그럴까요.
진해에서는 이미 찬반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일은 상당부문 진척되어 있습니다. 세계군악의장페스티벌위원회 홈페이지는 이미 참가팀소개에서 일본 해상자위대 동경음악대의 참가를 홍보 중입니다.
지난 3월 4일에서 6일 사이에는 해상자위대 동경음악대 관계자 2명이 진해시를 방문하여, 공연장과 행사가 벌어질 중원로터리, 제황산 공원을 찾아 사전 점검했고, 숙소도 답사했으며, 합동 연주를 벌이기로 한 진해 남중학교 관악대 관계자들과 미팅까지 마쳤습니다. 이미 현실입니다.
2.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 본 자위대
제 개인적으론 반대합니다. 먼저 일본헌법 제9조를 확인하고 갈까요.
“제9조 [전쟁의 포기, 전력의 불보유, 교전권의 부인]
①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 평화를 성실히 희구하며 국권의 발동인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를 포기한다.
② 전 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육, 해, 공군 기타의 전력을 보유하지 아니한다.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물론 일본의 강경우파는 제9조를 전면 개정하려 합니다. 논리는 ‘보통국가화’입니다. 미일동맹과 국제정세의 변화, 여기에다 북한의 위협이 중대한 논리입니다. 사실 제9조가 사문화되었다는 논리도 상당합니다. 일본의 국방비는 따지고 보면 우리 국방비 보다 더 많습니다. 실제 전력도 우리보다 더 낫다는 입장까지도 있을 정도니까요. PKO활동을 통해 국제무대에도 진출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라크에도 자위대의 이름으로 파병되기까지 했었지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엄연히 일본 헌법은 헌법이고, 진정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 없는 이상,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독도 영유권 분쟁, 몇 년을 주기로 거듭되는 교과서 왜곡, 그리고 틈만 나면 들썩대는 망언의 행렬, 여기에다 최근 남북한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일본 극우정치인의 발언에다, 제주도를 사버리자는 헛소리들을 종합해보면, 겉과는 달리 진심어린 차원에서 아직까지도 한일 간에는 전후 청산이 끝나지 않았다는 게 제 본심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북한 측과는 아직 전후청산을 위한 절차조차도 개시된 바 없습니다.
물론 미래를 향해서 나아가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때린 사람부터 반성해야 합니다. 때린 사람은 아무런 반성이 없는데, 맞은 사람이 나서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우리 잊고 살자’고 얘기하자는 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유태인에 대한 독일의 정도는 못되더라도, 최소한의 일관성과 진정성은 유지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8천명 중 단 2명만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사는 일본
일본 NHK가 군국주의 시대 육군병원 기록 8천 건을 분석한 일이 있습니다. 그 중, 마음에 기인한 질환으로 진단된 것이 약 2천 건인데, 그중 학살을 한 죄의식에 떨고 있다고 기술된 기록을 찾아보니 딱 2건이었습니다.
제2차 대전에서 미군 병사 가운데 정신장애를 일으킨 비율은 1천명에 101명 혹은 다른 논문은 1천명에 25 내지 250명이라고 보고되었습니다. 죽음의 공포와 폭력에 직면하여 10명에 1명꼴에 정신장애에 빠졌던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연구결과는 무려 35.8%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나 체첸 침공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일본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입니다.
“온갖 곳에 정신적으로 상처 입지 않은 사람들의 가면이 있다. 무표정한 그것, 온화한 듯 허무한 미소를 띤 그것, 긴장한 그것, 피곤한 그것”
노다 마사아키가 쓴, “전쟁과 인간: 군국주의 일본의 정신분석”이란 책입니다. 이제 음악의 이름으로, 국악의 이름으로, 일본이 찾아오는 건가요.
4. 전범 도조 히데끼의 유언
도조 히데끼란 전범이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이후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받은 자입니다. 동경 출신으로 육군대장과, 육군상, 내무상, 수상 및 참모상을 지낸 자로, 태평양 전쟁을 주동한 인물입니다. 그자의 유언은 이랬습니다.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저와 오래 교분을 나눴던 친구들게 전해주십시오. 제가 천황폐하의 전쟁책임을 떠맡고, 천황폐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책임을 다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입니다. (황허이, “도쿄대재판” 예담)“
피해자에 대한 반성, 전쟁책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일부 정치인들의 행적과 관련해서 논란이 됐던 행사가 있습니다. 2004년 6월 18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일본 대사관 주최 자위대창립 50주년 기념 리셉션이 열렸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연히 반대에 나섰지요. 물론 경찰은 봉쇄했습니다. 일부 정치인들이 행사장에 들어가려다, 기자들이 취재에 나서자 서둘러 되돌아갔던 일이 있습니다.
물론 현실을 무시한 완고한 반일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진정성이 확인되지 않는 이상 우리도 최소한 지켜야 할 자존심은 있는 것 같습니다. WBC 야구경기에서 이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일본보다 축구를 잘한다고 해서 그 치욕이 씻기는 것도 아닙니다. 일본 천황의 방문이 아직까지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허용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맥락일 것입니다.
왜 음악을 음악으로 바라보지 않느냐고 비판하시는 분들도 계실 줄 잘 압니다. 이 정도의 군사교류는 허용될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일본과 이미 한미일호 합동훈련을 통해 군사교류를 하고 있는 마당에 무슨 소리냐 이러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벚꽃 자생지가 이미 우리땅으로 밝혀진 지 오래인데, 이 정도 쯤이야 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질문은 일본 자위대 군악대의 방문을 비판하는 쪽에서 받아낼 질문이 아닙니다. 왜냐고요? 이런 질문은 당연히 일본 쪽에 던져져야하고, 그중에서도 일본 극우파에 던져져야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 그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책임 또한 우리의 것이 아니라 일본의 것입니다. 일본 스스로 헤쳐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이 어떻게 해야 하는 지는 일본 스스로 잘 알 것입니다. 자위대 군악대 공연은 단순한 민간교류 차원을 넘고 있다는 것이 제 속좁은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