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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유서

바코바 2009. 3. 27. 15:45

[백범 60주기-9] 윤봉길 의사가 두 '꼬마' 아들에게 보낸 편지

[기획-백범 60주기] 2009/03/23 10:43 정운현

농업박물관 앞에 있는 <농업독본> 돌비석


서울 서대문 네거리 농업박물관 앞에는 대형 돌비석이 하나 서 있습니다.
이 돌비석에는 음각으로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습니다.

"농사는 천하대본이라는 말은 결단코 묵은 문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억만년을 가고 또가도 변할 수 없는 대진리입니다. 사람의 먹고사는 식량품을 비롯하여 의복, 주옥의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상업, 공업의 원료까지 하나도 농업생산에 기다리지 않는 것이 없느니만큼 농민은 세상 인류의 생명창고를 그 손에 잡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돌연히 상공업 나라로 변하여 하루아침에 농업이 그 자취를 잃어 버렸다 하더라도 이 변치못할 생명창고의 열쇠는 영원히 지구상 어느 나라의 농민이 잡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농민의 세상은 무궁무진합니다"

농업박물관 앞이니 이런 내용의 돌비석이 세워질 만도 합니다만,
정작 이 글귀를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럼 이 <농민독본>을 저술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요?


놀랍게도 이 <농민독본>의 저자는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입니다. 흔히 윤 의사는 1932년 중국 상해 홍구공원 의거의 주인공으로만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윤 의사는 이미 청년시절부터 고향에서 농촌 계몽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을 해온 분입니다. 먼저 윤 의사의 간단한 이력을 살펴보면,  

1908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윤 의사는 10세 되던 해인 1918년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민족정신의 영향으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하였습니다. 이후 윤 의사는 동생과 함께 한학을 공부하였으며, 1926년부터는 향리에서 농민계몽·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농민독본(農民讀本)>은 이 무렵 윤 의사가 자신이 조직한 야학에서 교재로 활용하기 위해 손수 집필한 것입니다.

'대장부가 뜻을 세워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 윤봉길 의사


윤 의사는 이후 ‘부흥원(復興院)' ‘월진회(月進會)' 등의 농민단체를 만들어 농촌 자활운동을 계속 전개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통치가 날로 고착화되면서 고향에서의 농민운동은 적잖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윤 의사는 조국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1930년 3월 집을 나섰습니다. (이 때 남긴 문귀가 '丈夫出家 生不還'입니다.) 이듬해 우리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해에 도착한 윤 의사는 교포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직공생활을 하거나 길러리에서 야채장수를 하면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후 상황을 <백범일지>에서 보면,

그러던 어느날, 동포 박진(朴震)의 종품(말총)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적이 있는 윤봉길(尹奉吉) 군이 홍구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다가 조용히 나를 찾아왔다.

“제가 채소바구니를 등 뒤에 메고 날마다 홍구 방면으로 다니는 것은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중일전쟁도 중국에서 굴욕적으로 정전협정이 성립되는 형세인즉,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마땅히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는 동경 사건과 같은 경륜이 계실 줄 믿습니다. 저를 믿으시고 지도하여 주시면 은혜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종전에 공장 구경을 다니며 윤군을 보고, 그가 진실한 청년 노동자로 학식은 있으나 생활을 위해 노동을 하거니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해 보니 자신의 몸을 바쳐 큰 뜻을 이룰 의로운 대장부였다. 나는 감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有志者 事竟成)고 했으니 안심하시오. 내가 요사이 연구하는 바가 있으나 마땅한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 참이었소. 전쟁중에 연구․실행코자 한 일이 있었으나 준비 부족으로 실패하였소. 그런데 지금 신문을 보니 왜놈이 전쟁에 이긴 위세를 업고, 4월 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천황의 천장절(天長節) 경축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며 군사적 위세를 크게 과시할 모양이오. 그러니 군은 일생의 대목적을 이날에 달성해 봄이 어떠하오?”
이에 윤군은 쾌히 응낙하며 말하기를,
“저는 이제부터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준비해 주십시오.”
하고 자기 숙소로 돌아갔다.

거사 3일전인 4월 26일 백범과 윤봉길 의사의 기념촬영


일이 될려니 하늘이 도왔다. 일본군은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천장절(일왕 생일) 축하식을 거행한다고 밝히고는 그날 식장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물병' 하나와 점심으로 ‘도시락’, 일본 국기 하나씩을 가지고 입장하라고 신문에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윤 의사가 의거 당일 ‘도시락 폭탄’을 가지고 행사장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때문이었는데, 거사 당일 윤 의사가 던진 것은 '물통 폭탄'입니다. (참고로 도시락 폭탄은 거사 후 '자결용'이었습니다)  

거사 전날인 4월 28일, 백범은 폭탄 두 개를 가지고 김해산(金海山)의 집에 가서 “윤봉길 군을 내일 아침 중대 임무를 띠고 동북 3성으로 파견할 터이니, 저녁에 쇠고기를 사다가 내일 아침밥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윽고 운명의 4월 29일. 백범은 새벽에 윤 의사와 함께 김해산의 집에서 아침밥을 같이 먹었다. 윤 의사의 기색은 태연자약한 모습이었다. 백범과 윤 의사가 ‘작별’하기 직전 상황을 <백범일지>에서 보면,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자고 하였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주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이자, 무심한 자동차는 경적소리를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하였다.
나는 그 길로 조상섭(趙尙燮)의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점원 김영린(金永麟)에게 주어 급히 안창호 형에게 보냈다.
“오늘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시오. 무슨 대사건이 발생될 듯합니다.”
편지를 보내고 그 길로 또 석오 이동녕 선생 처소로 가서 그 동안의 진행 경과를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난 뒤 무슨 소식이 있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오후 1시쯤 되자 곳곳에서 허다한 중국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전하는 말이 달라 정확한 상황을 확인할 수 없었다. “홍구공원에서 중국인이 폭탄을 던져서 다수 일본인이 즉사하였다” “고려 사람의 짓이다”라는 등 소문이 분분하였다.
어저께까지 채소바구니를 메고 날마다 홍구로 다니면서 장사하던 윤봉길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 사건을 연출할 줄이야. 나 이외에 이동녕․이시영․조완구 등 몇 명만 이 사실을 짐작하였을 뿐이고, 그날의 거사는 나 혼자만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즉시 석오 선생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보고하고 나서 자세한 소식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자 오후 두세 시경에 다음과 같은 신문 호외가 터져 나왔다.

홍구공원 일본인의 경축대 위에서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가와바다(河端)는 즉사하고, 시라카와(白川) 대장, 시게미츠(重光) 대사, 우에다(植田) 중장, 노무라(野村) 중장 등 문무대관이 모두 중상 운운.



윤 의사 두 아들 '모순'과 '담'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거사에 앞서 윤 의사는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두 아들에게 편지 한 장을 남겼습니다.
제목은 위의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에게'.
'큰일'을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윤 의사는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 즉 '장부는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비장한 문구를 남긴 바 있는데, 윤 의사는 끝내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참으로 장부다운 삶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 의사는 의거 후 현장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상해에 파견된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이송돼 오사카(大阪) 위수형무소에 수감중이던 윤 의사는 그해 12월 19일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일본땅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윤 의사의 의거 소식이 세계에 전해지자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蔣介石)은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한 한국인 청년이 해냈다”며 격찬했으며,  이후 임시정부에 대한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32년 12월 19일 24세의 나이로 일본땅에서 순국한 윤봉길 의사. 이마의 검은 점은 총알 흔적이다.


윤 의사 생가를 방문한 백범(왼쪽 끝). 왼쪽 두번째부터 윤 의사 부친 尹璜, 모친 金元祥, 부인 裵用順, 아들 尹淙.


광복후 환국한 백범은 1946년 4월 충남 예산 윤 의사 생가를 방문, 윤 의사 가족들을 만나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일본땅에 묻힌 윤봉길 의사를 비롯해 이봉창, 백정기 등 3의사(義士)의 유해를 발굴해 용산 효창원에 안장했습니다. 서울 양재동에 '매헌윤봉길기념관'이 문을 연 것은 그로부터 42년만인 1988년 12월입니다. 기념관에는 <농민독본>(보물 제569-10호) 등 각종 서책류와 의거 당시의 소지품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정부는 1962년 윤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을 추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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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윤 의사의 의거 당일인 4월 29일자 <조일(朝日)신문> 호외에 실린 사진을 두고 진위 논란을 벌인 바 있다. 경희대 강효백 교수는 윤 의사의 의거 당시 상황을 보도한 당시 중국의 현지신문들의 보도내용을 검토한 후 성형외과의 자문을 얻어 사진 속의 인물은 윤 의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윤 의사 가족들은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사진 속의 주인공이 윤 의사라고 주장하고 있어 진위 논란은 아직 매듭지워 지지 않았으나 언젠가 진실이 밝혀지리라 믿는다.


아래 사진에서 일본군에 끌려가는 사람이 윤 의사를 닮지 않았다는 주장이 제기돼 진위 논란에 휩싸인 의거 당일자 <조일신문> 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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