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부산 사는 구봉진씨

바코바 2009. 5. 29. 16:52

 

언소주:http://www.hani.co.kr/arti/society/media/358854.html

 

 시국선언 1만 명 돌파... 이번 주도 줄이어
"정부 미봉책 일관하면 '풀뿌리'까지 번질 것"
대학교수 넘어 학생·노동자·전문가까지 확산... 종교인 3천여 명 동참
09.06.15 12:15 ㅣ최종 업데이트 09.06.15 13:43 이경태 (sneercool)

  
전국에서 이명박 정부의 전면적인 국정 기조 쇄신을 요구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그래픽
시국선언

이명박 정부의 국정쇄신을 촉구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한 이들이 1만 명을 훌쩍 넘어섰다.

 

법조계 시국선언 등 일부 대학교수들이 겹치는 경우도 있지만 1991년 5월 60개 대학, 교수 2600여 명이 참여한 '공안통치 종식' 시국선언 이래 가장 많은 인원이 참여한 것이다.

 

지난 3일 서울대(124명)·중앙대(68명)로부터 촉발된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은 1987년 6.10 항쟁 22주년을 맞이하는 지난 10일 사상 최대 규모인 4천 명을 넘어섰다. 하지만 MB 정부의 반성과 쇄신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은 멈추지 않고 대학생·청소년·사회 원로·종교계·법조계 등 각계각층으로 확산됐다. 

 

10일 당일에만 21세기 청소년 공동체 '희망' 등 13개 청소년 단체가 총 3076명 청소년의 명의로 '배운 대로 행동한다, 민주주의 지켜낸다'란 기치로 시국선언문을 발표했고, 법조계 628명과 법학교수 195명이 '인권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다음날인 11일엔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178명)과 철학교수 및 학생(505명), 아주대 교수(63명)들이 시국선언의 열기를 다시 지폈다. 또 12일엔  울산대(55명)·덕성여대(21명)·부산원로재야인사(35명)가 나섰고, 지난 14일에는 한의사와 한의대 학생(1758명)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용산 참사·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사죄와 국정 쇄신을 촉구하고 나섰다.

 

"미봉책으로 봉합하려 하면 풀뿌리 단위까지 시국선언 열풍 퍼질 것"

 

  
6·10 민주항쟁 22주년을 맞은 10일 저녁 서울광장에서 열린 '6월항쟁 계승·민주회복을 위한 범국민대회'에서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있다.
ⓒ 남소연
6.10 범국민대회

각 시국선언문마다 표현 수위의 차이는 있지만 주된 요구는 같다.

 

대다수의 시국선언 참가자들은 ▲ 전직 대통령의 서거와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한 이 대통령의 사과 ▲ 평화로운 남북관계의 복원 ▲ 서민들을 위한 경제·복지 정책 ▲ 작년 촛불집회 이후 제한받고 있는 사상·표현·집회·결사의 자유 보장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승창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상임위원장은 이에 대해 "그만큼 이명박 정부의 국정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회 전반적으로 폭넓게 퍼져 있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 위원장은 이어 "일반 블로거들의 시국선언 등 이전과 다른 형태의 시국선언도 이어지고 있다"며 "전에 '말하지 않던 이'들이 말하기 시작했는데 정부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 같아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지난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 때 전체교수 중 일부 교수의 발언이라고 말한 것처럼 지금 사태를 받아들이면 안 된다"며 "이명박 정부의 현 정책이 계속 유지될 경우 시국선언은 다른 형식이나 행동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석운 한국진보연대 공동대표는 "이명박 정부가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민생을 내팽개치고, 남북관계를 파탄시키는 정책을 펴는 것에 대한 광범위한 위기 의식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지금은 이른바 지식인들, 여론주도층 인사들이 나서고 있지만 이제 곧 일반 서민들까지 시국선언에 동참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미 각계각층에서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며 "이에 대해 정부가 미봉책으로 봉합하려 한다면 농촌 마을, 각 직장, 각 도시의 주부 조직 등 풀뿌리 단위까지 이 시국선언 열풍이 번져나갈 것이다"고 예측했다.  

 

불교·천주교·개신교 등 각 1천여 명의 성직자들도 이번 주 시국선언 동참

 

  
전 해인사 주지인 영공 스님이 9일 오전 서울 조계사 대웅전 앞에서 열린 불교계 108인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합장하고 있다.
ⓒ 남소연
불교계 시국선언

 

시국선언의 열기는 이번 주에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한국진보연대 한상렬 고문, 고(故)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 등이 참여한 반전평화 자주통일 원로 273명이 15일 오전 11시 향린교회에서 민주주의 수호, 남북관계 복원, 전쟁반대 평화실현을 위한 시국선언문을 발표한다. 또 같은 시간 홍익대 교수(25명)도 홍익대 와우관 앞에서 "국민을 섬기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한다.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 성직자가 각각 1천명 이상씩 참여하는 대규모 시국선언도 이번 주에 잇따라 나온다.

 

지난 9일 '현 시국을 염려하는 불교계 108인'의 명의로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불교계는 이날 오후 1시 서울 조계사에서 조계종 중진 스님과 실천불교 전국승가회 소속 스님 등 1천여 명이 참여하는 시국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다. 1987년 6월 당시 시국선언(750여 명) 이후 최대 규모다.

 

조계종은 이날 "이명박 정부의 일방통행식 정책이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오는 7월 1일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결의대회를 열 계획이다.

 

천주교도 이날 오후 3시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전국의 천주교 교구사제 1천여 명이 참여하는 시국토론회를 연다. 이들은 이날 저녁 7시 용산 참사 현장인 남일당 건물 앞에서 시국미사를 봉헌한 뒤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기로 했다.

 

개신교의 진보 성향 목회자들도 오는 18일 시국선언에 나설 예정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한국기독교장로회, 대한성공회 등 개신교의 진보 성향 목회자들은 18일 오전 11시 종로구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서 '목회자 1천인 선언'을 할 예정이다.

 

또 인터넷에서는 블로거들의 시국선언도 확산되고 있다.

"학생, 오늘을 잘 새겨둬...이게 바로 우리 역사니까"
[대한문 분향소의 2가지 풍경] 군홧발에 짓밟힌 비극적인 현대사
09.05.31 20:39 ㅣ최종 업데이트 09.05.31 20:39 송영대 (greenyds)

지방에 살다보니 서울에 올라가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도 이번에 짬을 내어 학술대회 및 박물관 특별전을 관람하기 위해 이틀간 올라와서 머무르기로 하였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시청광장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서울로 올라온 시간이 꽤 늦었던지라 노제에 참여하긴 힘들었다. 하기에 29일은 그럭저럭 시간을 보냈었다.

 

하지만 인터넷을 하면서 29일에 있었던 영결식과 노제, 그리고 시민들의 촛불집회 등의 모습을 보면서 괜스레 후회되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로서 과거의 역사만을 보기보다, 현재의 역사 또한 보고 느껴야 된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30일날 아침 발걸음을 옮겨 서울시청으로 향하였다.

 

지방에 사는 사람으로서 방송이나 인터넷으로만 보던 대한문 분향소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온라인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현실은 내 상상을 초월하였다. 서울시청에서 난 상상치도 못한 모습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상상하지도 못한 현실을 맞닥뜨리다

 

  
▲ 오열하는 시민과 분향소. 한 시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 앞에서 절을 하며 오열하고 있다. 현장은 새벽에 경찰들에 의하여 만신창이가 되었다.
ⓒ 송영대
대한문 분향소

 

  
▲ 분향소에 걸린 공고. 시민들이 전지에다가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 송영대
대한문 분향소

아침 9시가 넘어 시청역 1번 출구로 나오자 그만 어안이 벙벙하였다. 시청광장을 메우고 있는 경찰버스 때문보다도 침통의 고요함이라는 기괴한 느낌 때문이었다. 이런 침통함은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한문 분향소에서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찾은 곳이었지만 대한문 분향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내가 직접 맞닥드린 모습은 그동안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보던 그런 모습이 아닌, 말 그대로 폐허로 변해버린 분향소 모습이었다. 가운데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진과 탁자 등으로 분향소의 구색을 갖추었지만 무너진 천막과 부숴진 집기들, 난잡한 모습은 그야말로 상상을 깼다.

 

곳곳에서 탄식소리와 통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망연자실하게 현장을 바라보는 시민들, 꾹 다문 얼굴로 조문객들을 받는 자원봉사자들, 조문을 하기 위하여 줄지어 대기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바쁜 기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밤을 샌 듯 피곤한 모습의 시민들도 여럿 보여 밤새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그날 새벽에 있었던 일들을 큰 소리로 말하며 분을 토하는 아저씨와 언론의 보도 등을 종합해 보면 5시 30분경 경찰들이 서울광장에 있던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내쫓으면서 이곳 분향소도 발길질을 하였다고 한다.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고 그 과정에서 영정과 화환 등이 쓰러졌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시민들은 현장에 기록하였고, 또한 그러한 경찰들의 만행을 그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현장을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내가 찾은 그 시각. 수백 명의 시민들은 다시 이곳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지키고자 하였다. 불과 거창한 국민장을 치른 지 하루 만에 만신창이가 된 분향소. 이게 바로 현대사의 모습인가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애통하였다.

 

한 아저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한 상태로 십 분이 넘게 흐느끼고 통곡을 하였고, 주위 사람들은 이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사마저도 짓밟은 경찰들에게 크나큰 분노를 자아내면서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민 가운데에서 학생들에게 큰 소리로 말하는 어르신도 있었다.

 

"학생들, 잘 봐둬. 어른이라고 꼭 본받지만 말고, 본받을 건 본받되, 배우지 말아야 할껀 배우지 말라고. 그리고 오늘을 잘 새겨둬. 이게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니깐."

 

  
▲ 오후의 대한문 분향소. 경찰들에 의해 짓밟힌 분향소에 시민들은 그대로 줄을 이어 추모를 하고 있다. 곳곳에서 분노한 시민들의 글귁 눈에 띈다.
ⓒ 송영대
대한문 분향소

 

  
▲ 추모하기 위하여 기다리는 시민들. 비록 대한문 분향소가 부숴졌지만, 수많은 시민들은 국민장 때와 마찬가지로 추모를 하기위해 길게 늘어서 있다.
ⓒ 송영대
대한문 분향소

 

"학생 오늘을 잘 새겨둬, 이게 바로 우리 역사니까"

박물관에서 특별전을 관람하고 난 후 일부러 시간을 약간 조정하였다. 내려갈 기차표를 이미 끊어놓은 상태였지만 시청광장의 모습을 또 한 번 보고 싶었기에 1시간 정도의 여유를 가졌었다. 다시 시청광장으로 가고, 아침과는 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오후 3시 30분경 내가 다시 대한문 앞을 찾았을 때, 1번 출구에는 경찰들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다시 대한문 분향소로 가니 아침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언뜻 봐도 수백명, 혹은 천여 명이 넘는 인원이었고, 이들의 모습은 아침보다 격양되어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추모를 하고자 줄을 서서 기다리고 현장은 아침과 마찬가지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약간은 복구되었지만 대부분 시민들에게 그 현장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하여 그대로 둔 곳이 많았다. 그리고 새벽의 만행에 대한 분노의 글과 현수막들이 여기저기에 걸려있었다.

 

'군홧발에 밟힌흔적 현장보존! 해 주세요'

'49제까지는 여기는 아름다운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직대통령에 대한 예우인가?'

 

자원봉사자들 중에서도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이 돋보였다. 학생들은 생각보다도 많이 보였는데, 이들 모두가 이번 사건에 대해 애통하게 생각하고 또한 분노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작은 손을 보태어 분향소에 큰 힘이 되주고 있었다. 이렇게 모여 있는 가운데 갑자기 한 아저씨가 이곳으로 달려오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지금 학생들이 경찰들에 의해 출구에 막혀 있습니다. 모두들 가서 학생들을 도와줍시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모두들 그 아저씨를 쳐다보았다. 나로서는 잠시 망설였다. 이곳에 오래있기엔 기차표 시간 때문에 크게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현장을 살펴보자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을 때 그만 깜짝 놀랐다. 수십 명의 시민들이 1번 출구로 몰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청년이든 학생이든, 여성이든 노인이든 상관없이 모두들 주먹을 꽉 쥐고 출구를 향해 걸어 나갔다.

 

"폭력경찰 물러나라!" vs "정부 지시기에 어쩔 수 없다"

 

이미 백여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1번 출구에 몰려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폭력경찰 물러나라! 폭력경찰 물러나라!"

 

수많은 시민들이 손을 들고 구호를 위치고 이미 몸싸움도 벌어진 상황이었다. 여기에 시민들이 한꺼번에 합류하자 경찰 측에서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미 방패로 방어를 하면서 출구를 봉쇄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그런 경찰들을 밀고 있었다. 곳곳에서는 "으쌰, 으쌰" 거리면서 집단적으로 힘을 내어 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민들에는 청년, 학생, 스님, 여성 등 이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나또한 인파에 밀리면서 어쩌다보니 제일 앞자리로 가게 되고 몸싸움에 끼기도 하였다. 출구 아래의 학생들 또한 경찰들을 밀면서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경찰들의 얼굴에서도 이렇게 시민들과 부딪히기 싫어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몸싸움보다 대화로서 시민과 경찰이 서로를 설득시키려는 모습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었다.

 

"여러분 이러지 마세요. 이러다가 정말 사람 다쳐요!"

"왜 출구를 막고 있는 것입니까?"

"저희도 여길 막을 수 밖에 없어요!"

"어서 비키세요. 시민들이 길을 지나가야하지 않습니까?"

"아저씨, 우리도 정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왜 우리가 이렇게 싸워야 합니까? 도대체 누굴 위해!"

 

급기야 한 여학생은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하였다. 경찰과 시민이 왜 서로 싸워야하냐면서 울먹이면서 길을 비켜달라고 하였다.

 

"잘못했어요. 그니깐 길을 비켜주세요. 이렇게 싸울 필요까진 없잖아요."

 

몸싸움이 일어났다가 다시 소강상태가 되어 구호를 외치고 설득을 하거나 하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몸싸움이 일어나는 와중에서는 아찔한 장면들도 더러 보였다. 몇몇 경찰들이 시민들에게 끌려나와 무장해제를 당하고 그러한 경찰들에게 시민들은 폭행하지 말라면서 감싸주고 한쪽으로 비켜서게 하였다.

 

그리고 서로 간에 물병이 날아가거나 지하철 아래에 물을 뿌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다소 폭력적인 대응을 자제하라면서 흥분한 시민들과 경찰들을 막아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10분정도 다소의 소란이 있자 경찰 쪽에서는 전경들이 투입되었다.

 

전경들은 헬멧과 방패를 들고 다시 길을 가로막았으며 또다시 몸싸움이 일어났다. 분노한 시민들은 전경들에게 현 정부에 대한 비판을 성토하기도 하였고, 흥분한 전경들은 방패와 경찰봉으로 시민들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명박이 쪽바리한테 충성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그따위가 대통령이야! 일국의 대통령이야!"

"노짱 만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섣부른 몸싸움으로 서로 피해를 보지 않게하기 위해 시민들과 경찰들 사이에서 막아서는 것 밖에는 없었다. 시민들의 이미 강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고, 또 경찰들에게 강한 불신을 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맨손이었고 또한 다수는 서로의 싸움을 막기 위해 몸을 던져 막아서고 있었다.

 

나로선 이곳에 오래 있기엔 사정이 힘들었기에 할 수 없이 먼저 자리에서 떠야했다. 곳곳에서 시민들은 몰려오고 또한 이렇게 된 정부를 욕하며 현실을 개탄하고 있었다. 나중의 보도를 보면 이후 시민들과 경찰들의 대치는 계속 되었고 강제진압이 이뤄져 70여명이 잡혀갔다고 한다. 이게 바로 2009년 현재의 대한민국이리라.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정치로 사람들이 죽어가고 그 와중에 우리가 흠모하는 큰 정치인마저 운명을 달리하셨다.

 

이제 또다시 기나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작년보다도 더욱더 시민들이 분노하고 또한 정부를 성토한다. 싸움의 결과는 모르지만 이미 정부에 대한 신뢰는 강하게 추락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정치적 타살이라는 견해가 주를 이루고, 국민장 하루 만에 경찰의 강압적인 태도에 시민들은 반발하고 있다. 정부와 경찰은 진정 국민들의 뜻을 알고 그에 맞춰 강압적인 태도가 아닌, 같이 대안을 모색하고 존중해야 하는 태도를 보여야한다.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나기 전에.

 

  
▲ 시민과 전경들의 몸싸움. 5월 30일 낮에 일어난 시민과 전경들의 몸싸움입니다. 시민들은 '폭력경찰 물러나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이들과 대치하고 있습니다. 몸싸움의 원인은 경찰들이 1번출입구를 막은 것에 대한 분노입니다.
ⓒ 송영대
노무현 대통령 서거

덧붙이는 글 | 5월 30일에 서울시청을 2번 방문하였습니다. 시간 관계상 많이 있진 못하였지만 그때 겪었던 일들을 소상히 적어보았습니다.

 

 

"함부로 밥 사려고 하지마라", 노무현을 보낼수 없는 사람

노컷뉴스 | 입력 2009.05.29 15:27
 

[부산CBS 박중석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이 있은 29일 부산역 분향소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2002년 대선당시 노 전 대통령의 선거 로고송을 틀어 놓고 영정 앞에서 통곡을 하는 한 남성을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그 만큼 비통하고 처절하게 울던 이 남성은 구봉진(58)씨.
구씨가 노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85년 경남 통영에서 버스기사를 할 때였다.

"사장 앞에서 손가락에 담배 끼워 피웠다고 해고 당하던 시절 이였어요. 이러다 다 죽겠다 싶어서 통영에서 처음으로 노조를 만들려고 했는데 사장은 눈 시퍼렇게 뜨고 해고 하겠다고 하지, 아이들은 줄줄이 있지"

너무 힘들어 나쁜 생각도 했지만 어린자식들이 눈에 밟혀 차마 그럴 수 없었다는 구씨는 진주에 사는 친구로부터 노무현 변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이다 하는 생각으로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변호사라 하면 돈을 긁어모으는 직업인 줄로만 알았어요. 돈도 없고, 그래도 일단 찾아갔습니다."

구씨가 처음 만난 노무현 변호사는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반갑게 구씨를 맞아 줬다.
"기억에 남는 것은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어서 사람이 편안했습니다."


이후로 부산과 통영을 오가며 구씨가 속한 노동조합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뛰었다는 노 전 대통령이 변호비로 받은 것은 통영 멸치 한 상자.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만 하면 집 사람 한 테 쫓겨 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받지 않았습니다. 밥이라도 한 끼 사려고 하면 '가족들 밥 먹기 힘든데 함부로 밥 살라 하지 마라'고 하시고, 멸치 한 상자는 받으시더라구요"

88년 부산 동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 된 뒤 통영을 찾은 노 전 대통령은 여전히 예전과 같은 점퍼 차림이었다.

"의원 배지를 왜 안 달고 왔냐고 물으니까 배지 달면 서로 어색하고 뭐 하러 다느냐, 편하게 막걸리도 한잔 해야지 하시더라구요"

2002년 대선 때도 구씨는 1톤 트럭을 몰고 통영을 돌아다니면서 선거 운동을 했다.
"신났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 사람으로 보였을 겁니다. 이런 사람이 안 되면 누가 대통령 하나 이런 생각으로 신나게 뛰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구씨는 과거 선거운동을 했던 자신이 원망스럽게 까지 하다. "대통령이 안됐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제가 죄인 같고 한탄스럽습니다."라고 말했다

"애꾸 눈 뿐인 동네에 두 눈 다 뜨고 걸어가면 그 사람이 바보 소리 듣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그런 것 같아요" 구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이었다.
jspark@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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