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을 돌아다 본다

순직 미수 사건

바코바 2018. 8. 9. 22:09


용문지나 보림사 가기 전 배고픈 다리







순직 미수사건 

 

742월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시험에 떨어진 나는 앞날이 캄캄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우리 아버지(국민학교 선생님) 월급만 바라보고 있는 할머니, 어머니,

또 네 명의 동생들, 이 판국에 재수를 하겠다, 장사 밑천을 대 달라 등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럼 무얼 해서 먹고살아야 하나!

시골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기술이 없고 논밭이 없으니 농사도 못 짓지 돈도 경험도 없으니 장사도 못하고 덩치가 작고 힘도 약해서 막말로 노가다도 못하니 백수의 모든 조건이 완비된 상태였다.

 

남들은 꽃피는 춘삼월이니 뭐니 난리들인데 나는 지옥 같은 3, 4월이었다.

심신이 노곤한 5월 군청에서 면서기를 뽑는단다.

요새로 말하면 9급 공채, 그 때는 5급 을류 공채, 이조 때로는 초시라고나 할까.

할 수 없다 면서기라도 하자, 이 지긋지긋한 백수를 우선 면하고 보자.

쑥색 하복 바지에 유일한 사복인 감색 폴라 티 셔츠를 입고 시험장인 여중학교로 갔다.

 

하이고! 웬놈의 인간들이 이리도 많다냐? 완전히 백수들 전시장이다.

늙은 백수, 젊은 백수, 나같이 어린 백수, 여자 백수들까지,

시험문제는 학교 모의 고사 수준 이였다.

빨리 끝냈는데 시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갈 수 없단다,

책상에 엎드려 한숨 자고 나서 이제 합격하면 좋고 떨어져도 할 수 없다고 맘 편하게 먹고 기다리기로 했다.

합격자 발표날,

발표장에 간 친구 놈이 오더니 저는 합격이고 나는 떨어 졌다고 한다.

아니 시험이 그렇게 쉬웠는데 내가 떨어지다니 나중에 확인해 보니 그 반대였다.

면서기는 주판을 잘 놔야 한다는 아버지 말씀에 주산 학원을 다니며 여름을 보내고 가을이 되었는데 발령이 안 난다.

전화로 물어 보면 계속 기다리라고만 한다.

뒷집에 사는 군청 계장님께 어머니께서 하소연을 했더니 117일 발령이 났다.

시험 점수도 잘 나왔는데 왜 진작 얘기를 하지 않았냐고 한다.

미련하게 시험 성적대로 발령이 나는 줄로만 알고 전화만 해댔으니,

진작에 빽을 쓰든지, 차라도 한 잔 샀으면 몇 달 월급이 생겼을 텐데.

에고! 지금도 그 요령을 터득치 못하고 있으니 오호! 통재라!

어머니께서 사주신 베이지 색 점퍼를 입고 유치로 갔다.

 

6.25때 공비들이 드글 드글했고,

산이 험해 골짜기 사이에 간짓대를 걸칠 수 있다는 곳,

내가 알고 있는 유치는 대강 이런 정도였다.

지금은 도로가 포장되고 차들이 많아져서 오염이 되었지만

깨끗한 탐진강 상류, 산들, 고기들, 동양화를 무색케하는 안개 덮인 골짜기들,

13키로의 출장길 왕복 26키로를 눈, 비 맞아 가며 라디오를 듣던가 하모니카를 불어 가며 걸어 다녀서 걷는데 이골이 났었다.

 

흙먼지 날리는 버스를 타고 45, 유치 면사무소에 갔다.

마당에 가운데 동그란 화단에 노오란 국화꽃들이 바람에 물결치고,

가운데 멋 드러진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부면장님께 먼저 인사를 드렸다.

 

"- 이번에 발령 받고 온 박성홉니다"

 

서기주 부면장님 ...돋보기 너머로 건너다보시더니

 

"워메! 먼 애기가 와 부렸네"

 

지금도 작은 체구 때문에 나이로 손해를 보는데 20여년 전 이니 애기로 보일 수밖에 땅딸막한 총무 계장님이 하루 종일 송곳으로 구멍을 뚫고 철끈으로 문서를 매는 일만 시킨다. 손바닥에 불이 나도록.

 

1975년 여름 장마가 계속 되는데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일제 조사를 해야 했다. 내가 맡은 마을은 "운월리" 구름 운()자에 달 월()자 이름만으로도 산골짜기에 콕 박힌 오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가 오락가락하니 비료 포대에 주민등록표 두 권을 잘 싸서 배낭에 넣어 짊어지고 12일의 출장 길에 올랐다.

부슬거리는 비를 대책 없이 맞으며 운월1구에서 일을 보고 덜덜 떨리는 몸을 이끌고 2구에 도착하니 해가 기운다.

인피레스(모기약)를 입으로 불어 대강 뿌린 후 잠을 자는데 모기, 빈대, 벼룩들이 덤벼 강제로 헌혈을 하라고 한다. 여기 긁적 저기 긁적 나중에는 화끈거리고 두드러기가 생기고 이건 아예 전군 합동 화력 시범을 하는 것 같다.

잠을 자는둥 마는둥 옴두꺼비가 되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일어나 돌아가야 하는데,

이장님이 말리신다.

 

"어야 박주사! 냇가 물이 불어서 못 건너 꺼이시, 그랑께 오늘 저녁 자고 내일 가소"

 

! 강제 헌혈을 또 한번 하라는 말인가,

게다가 출장을 오늘까지만 내 놓았는데, 연락할 방법도 없고 에라 천재지변이니까 내일 가자.

 

다음날도 무정한 비는 계속 내려 냇물이 줄지를 않는다. 말리시는 이장님을 뿌리치고 길을 나섰다.

걱정스러운지 이장님이 따라 나선다.

첫 번째 계곡에서 이장님과 헤어져 두 번째 계곡에서 사건이 났다.

버들가지가 우거진 3-4미터 정도 되는 급류 속을 버들가지를 잡고 조심스럽게 발을 옮겨 건너편 버들가지를 잡는 순간 발이 미끄러지면서 몇 바퀴를 구른다.

코로 들어간 물의 불쾌한 느낌, 냄새,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

흐릿한 시야 속에 어떻게 버들나무 가지를 잡고 올라와 보니 건너편이 아니고 다시 제자리로 올라왔다.

 

"지에미 x할 재수 더럽게도 없네!"

 

소나기 맞다가 똥 밟은 중 궁시렁 대듯 투덜거리며 배낭을 열어 보니 비료 포대로 야물게 싸 놓아서 젖지는 않았다. 심장이 떨리고 손발이 떨려서 다시 건널 마음이 안 생긴다.

홀라당 젖은 옷에 신발을 벌컥거리며 돌아온 나를 이장님이 짠하다는 듯이 나무란다.

 

"그랑께 내가 머라고 하등가 째금 있다 가라고 항께는!"

 

세금으로 받은 젖은 돈이며 옷들을 아랫목에 펴서 말리고 또 한차례 헌혈을 한 다음, 가랑이 사이에서 방울 소리가 나게 사무실에 오니,

공화당 당원 브르독같은 면장님(임종염) 얼굴에 한차례 경련이 지나가고 일갈하시길

(침까지 튀겨 가며)

 

" 아니 거그만 비가 왔당가?"

'에이 x! 나는 디질라다가 살었는디!' (속으로만)

 

그 때 죽지 않은 박주사는 1991년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여 잘 묵고 자~알 살고 있다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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